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밀리 발라키레프 (문단 편집) == 생애 == 1837년 1월 2일에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가난한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차리고 10살 때 그를 모스크바로 데려가게 된다. 알렉산더 두브크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는데 중간에 집안사정으로 인해 음악을 그만둬야 할 처지가 되었지만 스승인 알렉산더 두브크가 그를 후원해줘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와 [[미하일 글린카|글린카]]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1856년 데뷔를 할 수 있었다. 1860년 전후로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 [[세자르 큐이]]를 만나게 되고 이들과 함께 [[러시아 5인조]]를 결성하고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1862년 안톤 루빈스타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맞서 무료 음악학교를 설립했고, 러시아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베를리오즈, 슈만 등 서구의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다. 1867년에는 프라하로 가서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지휘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음악협회 연주회의 지휘자가 되기도 했다. 1870년에는 피아노 독주자로 나서서 연주회도 개최했다. 하지만 음악학교 선생과 연주활동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난에 시달렸으며 1860년대 후반에는 자신의 부친과 여동생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게다가 음악적 반대파들의 비난에도 시달려야 했다. 결국 생활고와 싸움에 지친 발라키레프는 한동안 음악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특히 1870년 이후에는 과거와 달리 말수가 적어지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면서 한동안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음악적 활동을 일체 중단한 발라키레프는 생계를 위해 철도 부설 노동자로 일하는 등 고생을 했다. 다행히 기력을 회복한 발라키레프는 1876년부터 다시 음악계에 복귀하였으며 188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과거처럼 활발하게 음악인 모임에 나가서 토론을 하고 음악적 동지를 만들거나 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대신 조용히 연주활동과 작곡에 몰두했다. 발라키레프는 러시아 5인조를 결성한 지도자라는 전력으로 명예는 가질 수 있었지만, 사실상 말년에는 음악적 영향력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1910년 5월 29일 73세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